기초과학연구원의 나노구조물리연구단(단장 이영희)은 최대 20%까지 늘어난 상태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트랜지스터를 만들어내 웨어러블 컴퓨터 시대를 여는데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열쇠는 미세한 주름이 진 산화막 절연층이다.<편집자 주>
※ 이 글은 기초과학연구원이 발행하는 온라인 뉴스레터 IBS Newsletter 2015 Jan.(VOL 25)에 게재된 콘텐츠를 전재한 것입니다.
IT 산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일상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번창하고 있지만, 날로 악화일로인 분야도 있다. 바로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이다.
PC뿐 아니라 노트북 시장 역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태블릿 PC가 확산되면서 판매 실적이 내내 바닥을 헤매고 있다.
IT 산업의 총아였던 PC의 몰락은 사실 예견된 일이다. 스마트폰이 데스크톱 컴퓨터에 필적하는 성능을 과시하며 궁극의 컨버전스 기기로 등극하면서 고정된 장소에서만 사용해야 하는 PC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휴대기기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입력의 불편함은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주변기기가 개발되고 적당한 크기의 태블릿 PC가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구글이 구글 글래스(Google Glass)와 ‘말하는 신발(Talking Shoes)’을 출시하는가 하면 애플을 비롯한 주요 IT 기업들은 시계형 스마트폰을 차세대 주력 IT 기기로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동향은 PC 입장에서는 확인사살일 뿐 아니라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스마트폰마저 안정적인 성장을 장담하기 어렵게 한다.
‘휴대’라는 개념의 극한
IT 산업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지각변동은 ‘웨어러블’이라는 화두로 집약된다. 구글 글래스는 구글이 개발 중인‘안경형 컴퓨터’로 그 최전선에 있다. 이 기기는 화제에 오르내리는 것에 비해 꽤 단순하다. 안경처럼 귀에 걸쳐 쓰는 장치로 초소형 카메라와 눈 바로 앞에 위치하는 투명 디스플레이 모니터, 음성인식 모듈 정도로 구성된다. 사실상 지금까지 등장한 기술보다 특별히 앞설것도 없는 수준이다. 조금 신기하게 보이는 기술은 시선을 인식하여 포인터를 움직이거나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적외선 기반 안구 마우스 정도인데, 이 역시 오픈소스가 공개되어 5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웹캠과 몇 가지 부품으로 자작이 가능한 수준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알 없는 안경에 초보적인 스마트폰을 붙인 것 같은 구글 글래스지만, 이 기기의 진정한 강점은 바로 현실과 가상의 정보를 중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기술은 현실에 가상의 정보를 투영하여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예컨대, 오랜만에 만난 어릴 때 친구의 이름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을 때, 별도로 앨범을 뒤지거나 다른 친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도록 보는 사람마다 이름표를 붙여놓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 이름표는 원하는 대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어서 이름뿐 아니라 연락처, 최근 겪었던 일, 취향 등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확인할 수도 있다. 이 정도 정보야 웹서핑이나 소셜 미디어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지만, 대상을 인식함과 동시에 별도의 감각기관이나 도구를 동원하지 않고도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증강현실이 본격적인 상용 서비스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유사한 개념에 대한 요구는 늘 있었다. 특히 시각정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융합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사람은 타 감각보다 시각으로부터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정보를 얻는데도 눈은 두 개뿐이고 그나마도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에 따라 복잡한 기기를 다루어야 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사람 시각의 한계는 점점 중요한 문제가 됐다.
본격적인 아이디어가 등장한 때는 19세기, 한참 함포가 발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포병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당대 군사무기 중 가장 고도의 전문지식과 숙련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포병은 탄도학에 따라 장약의 양을 정하고 전
향력을 고려하여 조준해야 했으며 탄착점까지 도달하는 시간, 여러 대의 다른 포와 동시에 일제 사격하는 시간까지도 정밀하게 계산해낼 수 있어야 했다. 당연히 시계는 포병들에게 필수품이었다.
문제는 당시의 휴대용 시계가 손에 들고 보는 회중시계였다는 점이다. 시계를 보고 발사 시점을 가늠하려면 두 손, 최소한 한 손은 항상 시계를 들고 조작해야 했다. 손 놀릴 일이 많은 바쁜 함상전투 중에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독일제국 해군의 한장교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팔찌에 회중시계를 달자는 것이었다.
곧 스위스의 지라르 페레고(Girard Perregaux)가 독일 해군에 팔찌 시계를 납품하기 시작했고 포병들은 두 손을 자유롭게 놀리면서도 수시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술과 패션 사이
사실 팔찌 시계는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까지는 아니었다. 이미 1810년, 시계 제조사인 브레게(Breguet)가 사슬에 작은 시계를 매단 손목시계를 발명한 바있었다. 시계가 당대 최고의 첨단기기였음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최초의 ‘웨어러블 컴퓨터’인 셈이다. 그러나 구글 글래스보다 두 세기나 빨랐던 이 발명은 지금의 IT 기기만큼 환영받지는 못했다.
당시 기술로 작은 시계의 정확도를 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따라서 손목시계는 ‘성인 여성을 위한 비싼 장신구’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하드웨어 성능은 떨어지나 브랜드의 힘으로 먹고사는, IT 기업과 사치품 기업 간의 합작 제품과 비슷한 위상이었던 셈이다.
이런 사정으로 ‘웨어러블’이라는 수식어는 한동안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웨어러블 기기는 기술보다 패션이 출발점이었던 터라 기기의 정밀도와신뢰성이 중요한 군이나 연구기관에서는 장식품 취급을 받았다. 당시의 교양있는 남성들조차 “손목시계를 차면 스커트 입고 다니는 것쯤은 금방”이라며 손목시계를 꺼렸다. 당연히 독일 해군의 멋진 발명품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지금으로써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대적인 웨어러블 컴퓨터는 1970년대부터 꾸준히 등장했었지만 언제나 차마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겉모습이 문제였지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1980년에 등장한 웨어러블 컴퓨터는 비디오카메라와 컴퓨터를 조합한, 구글 글래스와 개념적으로는 유사한 물건이었다.
첨단 기술을 꽤 적극적으로 도입한 기기였지만 외관상으로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입고 돌아다닐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애플 Ⅱ에 사용된 프로세서와 메모리 등을 배낭에 눌러 담고 헬멧에는 초소형 CRT 모니터를 장비하다 보니 기기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진 것이다. 이보다 20년 가까이 지난 1998년에 출시된 트레커(The Trekker)도 일상생활에서 쓰기에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구글 글래스 개발 초기에도 가장 큰 우려는 착용했을 때 위화감이 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구글이 만든 것치고는 매끈하게 뽑혀 나온 터라 반응은 꽤 좋은 편이지만 알 없는 안경 특유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는지 선글라스와 조합해서 위화감을 줄인 제품도 계획 중이라고 한다. 기술면에서나 활용도면에서나 구글 글래스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MIT의 식스센스(SixthSense) 프로젝트도 손가락과 목걸이 등에 부착한 온갖 장비들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처리하는지가 문제로 지적받을 정도다.
요컨대, ‘입을 수 있다’는 수식어가 붙는 이상, 심미적인 관점을 배제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웨어러블 장치는 본질에서 사람의 겉모습에 어떻게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휴대성이나 사용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최대한 작고 눈에 덜 띄는 방향으로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에 고이 모셔두는 서버용 컴퓨터보다 소비자들이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에서 디자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진정한 ‘웨어러블’을 가능케 한 기술
19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상반된 풍경은 언뜻 시대적 배경의 차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패션을 여성에게 국한된 무언가로 이해한 19세기와 겉모습이 그 사람의 성실도와 삶의 자세를 대변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21세기. 그러나 사정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웨어러블 기기를 둘러싼 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술’이 있었다. 19세기의 군인들은 몸에 지닐 수 있게 하느라 정확성을 희생해서 크기를 줄인 기계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아무리 입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이 기계인 이상 기계로서의 신뢰성이 중요한데 당시 기술 수준으로서는 그러한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현재 개발중인 웨어러블 기기의 기본 개념과 이에 필요한 기술들은 벌써 한참 전에 개발이 완료됐다. 스마트폰과 소형 디스플레이, 이어폰만 있다면 그럴듯한 웨어러블 기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한 기술적 배경과 기술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지금은 오히려 디자인과 인터페이스에 훨씬 많은 공을 들일 수 있다.
웨어러블 기기의 기술적 발전의 핵심은 바로 소자 기술이다. 당장 디스플레이 장치만 해도 지금과 같은 박막형 디스플레이가 없었다면 구글 글래스를 만들겠다고 여전히 CRT 모니터를 어떻게 안경에 접목할지 고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투명한 배경에 정보를 표시해주는 HUD(Head Up Display)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딱딱하고 거추장스러운 기판의 제약 탓에 몸의 움직임을 고려한 인체공학적 디자인은 진작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세계의 주요 기업과 연구진이 ‘플렉시블’ 소자를 개발하는 데 매달리는 이유도 이처럼 웨어러블 시대, 휴대성과 편의성, 성능을 동시에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멋대로 휘어지고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반도체기판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플렉시블 소자 기술은 여러 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소형전자기기들. 좁은 공간에 많은 부품을 채워 넣어야 하다 보니 2차원적인 기판 설계만으로는 요구사항을 충족하기 어렵다. 현재의 휴대기기들은 대부분 휘어지는 기판을 사용하여 3차원적으로 휘고 꺾어 좁디좁은 공간 안에 최대한 부품들을 밀어 넣는다.
물론 이 정도 수준의 기술로는 우리가 상상하는 ‘웨어러블 기기’를 만들기란 어렵다. 마치 옷감처럼 몸에 밀착해서 움직임을 따라 변형될 수 있는 기기여야 제대로 ‘입을 수 있는’ 기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의 웨어러블 기기에는 단순히 기판이나 디스플레이를 휠 수 있다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배터리를 포함한 기기의 모든 부분이 자유롭게 변형되어도 망가지지 않는 정도의 유연성과 강성이 요구된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 물질은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이다. 이들은 전기전도도와 광학적 투명도, 기계적 특성, 열전도성이 뛰어나 ‘꿈의 신소재’라 불린다. 게다가 탄소 결정이기에 강도도 높을 뿐 아니라 유연성도 탁월하다. 웨어러블 기기에는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소재인 셈이다. 그래핀과 탄소가 최근 소재 분야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이유도 개념안과 아이디어는 존재하지만, 기존 소재로는 만들기 어려워 개발이 지지부진한 제품들을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IBS의 나노구조 물리 연구단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연구단은 지난 2013년 3월, 20%가량의 신축성을 지니는 투명 TFT를 제조하는 데 성공하여 ‘네이처 머티리얼즈(Nature Materials)’에 발표했다. 연구단은 TFT에 주름진 모양의 알루미나층 산화막을 형성하여 신축성을 지니도록 했다. 이는 전자소자의 기본 단위인 트랜지스터의 모든 부분을 세계 최초로 신축성 있는 재료만으로 만든 사례라 주목받고 있다. 휘어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늘어나는 성질까지도 확보한다면 접을 수 있는 컴퓨터는 물론이고 피부에 부착하는 센서나 단말기, 옷처럼 입을 수 있는 컴퓨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술과 패션의 결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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