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화제작 ‘오징어 게임’의 인기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다. K-콘텐츠의 파워를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인기 비결을 분석하는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 요소는 게임 룰처럼 간단하다. 가장 단순한 게임의, 가장 간단한 룰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다양한 군상과 현실은 동서양인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하여 필자도 대세 드라마에 얹혀, 현재 펼쳐지고 있는 반도체 흐름과 게임 관람 포인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첫 게임인 만큼 룰도 심플하고 탈락자를 일거에 줄일 수 있는 게임이다. 술래가 고개를 돌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만 움직여야 한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아웃이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종합반도체 기업(IDM)이 혼자 술래도 하고 플레이어도 하면서 혼자 ‘북치고 장구도 치고’ 다 했다. 80년대 이후 파운드리와 팹리스 사업 모델이 등장하며 분업이 본격화되었다. 90년~2000년대 이후 반도체 공정이 고도화되면서 팹리스-파운드리 모델은 확산되었다. 술래가 돌아서 구호를 외치는 순간 설계자산(IP), 팹리스, 제조장비, 설계자동화(EDA), 파운드리, 패키징 등의 참가자들이 결승선을 향해 성큼성큼 이동했다. 바야흐로 ‘반도체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파운드리의 움직임이 가장 과감하고 재빠른 상황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웹사이트 캡처)
설탕 뽑기
동그라미, 세모, 별 등 각종 달고나 설탕 뽑기를 모양의 손상없이 떼어내어야 성공이다. 드라마에서는 10분 안에 정확하게 떼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이 운명처럼 받아든 뽑기가 동그라미이든 좀더 복잡한 우산 모양이든 시간 안에 클리어해야 한다. 복잡한 모양의 뽑기는 특히나 정밀도를 요한다. 정밀도가 바로 생명이다.
현재 반도체의 정밀도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에서 판가름 난다. 노광 장비는 반도체 원재료 웨이퍼에 빛을 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장비이다. 반도체의 선폭이 10nm 이하로 떨어지면서 EUV 노광장비는 필수적인 반도체 핵심 장비가 되었다. ArF(불화아르곤) 노광장비는 193nm 파장의 빛을 내지만 EUV 파장은 13.5nm로 10분의 1 이하이다. 이처럼 세밀한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삼성전자와 TSMC가 내년 3nm 상용화 경쟁을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업체중 누가 더 정밀한 설계로 위급한 상황(총을 든 분홍색 감시자)을 빠져나갈 것인가.
줄다리기와 구슬치기
줄다리기와 구슬치기는 다분히 힘의 논리와 치킨 게임의 냉혹함이 서린 게임이다. 줄다리기는 힘이 강한 편이 유리하고, 구슬치기는 구슬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과감하게 배팅하는 놈이 이길 확률이 높은(드라마에선 일부 요령이 작동하지만) 게임이다. 다시 말해 강자(가진자)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80년대 미일 반도체 분쟁에 이어 최근에는 미중 무역 분쟁이 벌어지면서, 반도체가 이들의 줄다리기와 구슬치기에 동원되고 있다. 미중 간 수출통제 조치, 블랙리스트 확대 등 분쟁이 격화되며 반도체 산업 디커플링이 심화되었고 미중의 기술을 활용하거나 소재 장비를 공급하는 제3국의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중국의 줄다리기의 줄 위에 놓인 반도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이 위태로운 이유는 반도체가 한국의 근간 산업인 이유와 무관치 않다. 우리가 당장 이들을 상대로 구슬을 계속 딴다 해도, 호주머니에서 구슬(자본)이 끊임없이 나오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언제까지 공정한 싸움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징어
마지막으로 오징어 게임이다. 바닥에 오징어를 그리고 공격팀, 수비팀을 나누어 진행하는 이 게임은 아이들 놀이치고는 꽤 격렬한(?) 놀이다. 공격팀이 깨금발로 다니면서 꼬리를 밟고 머리로 돌아오면 승리하고 이들을 모두 탈락시키면 수비팀이 이긴다. 관건은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오징어 몸통 통과이다. 여기를 통과하면 공격팀도 두 발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지점은 곧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게임은 오징어 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분쟁, 반도체 기업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는 EU, 첨단 로직 반도체 양산체제 구축에 사활을 걸고 반도체 강국 부활을 노리는 일본 등과 한국은 경쟁해야 한다. 이 게임에서는 동지도 적도 없다. 이들 나라는 서로 공격팀을 꾸리기도 때로는 수비팀을 합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징어 몸통을 가로지르는 공격팀을 맨몸으로 막아서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 강력한 스크럼을 짜고 있는 수비팀을 뚫어야 하는 외로운 공격팀이 될 수도 있다. ‘깍두기’나 ‘깐부’같은 요행은 없다.
진짜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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