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노트] 기술의 세계, 공격과 수비의 딜레마
  • 2020-02-06
  • 신윤오 기자, yoshin@elec4.co.kr

동시에 3명의 총잡이가 결투에 나서면, 2명의 결투와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얼추 삼각형 꼴을 만든 총잡이들은 매우 난감한 고민에 빠지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나머지 2명 중 누구를 먼저 쏴야 하는가. 자신의 오른쪽 총잡이를 쏘는 사이에 왼쪽에 있는 총잡이가 자신을 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총잡이들의 눈동자만큼이나 눈치 싸움은 극에 달하고 결정의 순간, 재빠르게 총을 꺼내든다,

탕탕탕.

스파게티 웨스턴 무비의 고전으로 남은 ‘석양의 무법자’(1966)는 굳이 엔니오 모리꼬네의 긴장감 넘치는 영화 음악이 아니더라도 총잡이 3명의 결투라는 상황 설정 자체가 극적인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후에 한국의 한 감독도 이 포맷을 가져다가 영화 한편(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을 만들어 원작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았다. 자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지만, 3명의 동시 결투 장면은 필자의 기억에 두고두고 남아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 ‘요상한’ 결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공격과 수비’ 전략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누구든 먼저 공격을 해야 이득일지, 아니면 상대의 공격을 보고 수비적으로 나가야 살 수 있을지 말이다
 

3명의 동시 결투는 '공격과 수비의 딜레마'를 가져다 준다(사진: 네이버영화(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최근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도체 산업 정책을 보면서, 이러한 ‘공격과 수비’의 관계를 다시 끄집어 낸 것은 이와 전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부는 올해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분야) 분야에 2700억 원을 투입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2019년보다 예산을 3배 이상 늘린 규모이다. 더 나아가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2029년까지 산업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서 총 1조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요점은, ‘공격’적인 투자와 기술 개발로 우리 반도체 산업의 단점인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살려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수비’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2년 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면서 국내기업의 위상이 조금 주춤하기는 했지만 올해부터는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과 컴퓨팅 기술이 날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메모리 반도체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2013년 전 세계 반도체 산업 규모 약 3,000억 달러에서 메모리가 450억 달러(15%)였지만, 2018년에는 5,000억 달러 중 1,500억 달러(30%)를 메모리가 차지했다. 반도체 산업 전체를 메모리가 이끌고 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우리가 잘하는 메모리 분야를 더욱 잘해서 최고 위치를 수성하자는, 일종의 수비 전략이다.

공격과 수비 전략은 비단 반도체 문제 뿐만 아니다. 최근 렌터카 기반 차량호출서비스 ‘타다’로 촉발된 규제와 혁신의 문제도 그렇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정부가 혁신 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를 공격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기존 산업을 지켜야 한다고 야단이다. 생사의 문제가 걸린 당사자들에게는 수비는 곧 생존의 문제인 셈이다.

지금 기술 세계는, 마치 몇 명의 총잡이가 마주하는 모습

사실 공격이 먼저냐, 수비가 먼저냐의 문제는 축구 전술에서 오랜 이슈였지만 ‘수비’에 손을 들어준 지도자가 많다. 공격 축구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비가 밑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약팀은 물론 강팀도 모두 갖추어야할 기본 베이스가 수비이다. 공격이 곧 수비가 되고, 수비가 곧 공격이 되는 게 현대 축구의 묘미이자 딜레마가 된 것이다. 메모리도 지키고 시스템반도체 산업도 발전시키는 전략, 규제를 철폐하면서 전통 산업을 지키는 전략의 해법도 이러한 공격과 수비의 딜레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계 산업계는 마치 몇 명의 총잡이가 서로 마주하고서 수시로 공격과 수비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출 규제로 한국을 압박하는 일본,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는 중국과 자국 보호무역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도 여차하면 총을 뺄 기세이다. 이 냉정한 세계에서 어느 쪽을 공격하고 어느 쪽을 막아야 하는지 영화보다도 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현실 총잡이의 결론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결투를 벌인 총잡이 3명의 운명은 자명하다. 두 영화를 다시 찾아보니 결론은 모두 셋 중 ‘나쁜 놈’이 제일 먼저 죽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 상 가장 나쁜 악당이기 때문일 수 있지만, 어쩌면 가장 강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고 다른 한편과 협력하지 않아 그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술 세계에서도 참고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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