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시는 브랜드가 있습니까?” 바텐더가 물었다.
“딱히 원하는 건 없어, 아무거나 괜찮아요.” (중략) 그러더니 남자는 문득 생각한 듯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걸이나 까다로운 싱글몰트가 아닌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일본 소설 한자락으로 글을 시작하는 게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튼, 커티삭의 매력을 소개하는데 이만한 장면이 없다. 이 위스키를 주문하는 모습에, 별 흥미 없었던 남자가 강하게 끌렸다는 소설의 내용까지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기는 하지만.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지난해 개봉한 영화 [그린북]에도 커티삭이 등장한다. 영화는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1960년도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 뮤지션 닥터 셜리와 백인 보디가드가 함께 미국 투어공연을 하면서 겪는 일을 그린다. 카네기홀에서 살며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흑인 뮤지션이지만 인종 차별과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매일 술을 찾는다. 바로 범선이 그려진 커티삭이다.
커티삭 모형
커티삭 위스키(1923년 발매)는 범선의 제왕 ‘커티 삭(Cutty Sark)’에서 따 온 술이다. 1869년 진수된 클리퍼선 커티삭은 당시 ‘차’ 운송 경쟁에서 영국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선주인 조크 윌리스가 주문해 만들어졌다. 커티삭이라는 이름 자체가 스코트랜드인들이 입는 짧은 여성용 속옷을 말한다. 이 또한 로버트 번스의 시 ‘센터의 탬(Tam O'Shanter)’에서 유래하는데, 시에 등장하는 춤추는 매혹적인 마녀 내니(Nanny)가 속옷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커티삭호의 선수상이 바로 내니의 형상이다.
커티삭이 유명해진 것은 범선으로는 최고 속력인 17.5노트를 기록했다는 점 때문이다. 돛단 배, 범선의 시대가 저물면서 기선이 늘어나던 1885년, 새로 커티삭 선장에 임명된 리처드 우드짓은 첫 항해인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77일 만에 항해하였고 돌아올 때는 73일 만에 주파했다.
1889년 7월에는 최신식 기선인 브리타니아호보다 빨리 항해하는 기록을 달성한다. 당시 14.5~16노트로 항해 중이었던 브리타니아호의 당직사관은 선장에게 자신의 배를 추월하는 범선이 있다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역사와 범선] 중에서...)
이후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양을 누볐던 커티삭은 현재 현존하는 유일한 클리퍼선으로 영국 그리니치에 안치되어 있다. 과거 대항해 시대의 상징으로, 바람을 안은 38개의 돛을 펄럭이며 대륙에서 대륙으로, 해양에서 해양으로 뻗어 나갔던 영광을 뒤로 한채 이제는 관광객의 주요 인기 코스가 된 것은 역사의 순리일까.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그 정점을 찍으며 전성기를 누렸던 돛단배의 돛이 21세기에 다시 우주에 펼쳐졌다.
우주에 펼쳐진 돛
지난 7월 23일, 무게 5㎏의 식빵 한 덩어리만한 초소형 위성인 큐브샛, 라이트세일(LightSail) 2호가 우주로 날아가 돛을 펼쳤다. 바람대신 태양빛을 받아 에너지로 활용하는 ‘우주 돛단배’의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지난 2015년 라이트세일 1호를 발사했으나 당시에는 우주에서 돛을 펴는 시스템만 시험했었다.
초소형 위성인 큐브샛, 라이트세일(LightSail), The Planetary Society 홈페이지 캡처
이 같은 실험을 하는 이유는 우주비행을 하는데 연료탱크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료 탱크가 없다면 우주선을 가볍게 만들 수 있어 광속에 가깝게 속도를 낼 수 있다. 돛단배가 바닷바람을 타는 것처럼 라이트세일 2호도 태양풍을 맞으며 우주를 항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Spaceship(우주선)이나 이를 번역한 우주선(宇宙船)에 모두 ‘배(ship)’라는 용어를 쓰는 게 필연이었는지 모르겠다. 드넓은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범선의 ‘돛’과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초소형 위성의 ‘돛’의 원리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19세기 말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던 커티삭은 과거의 전설로 정박해 있지만, 이 우주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우주돛단배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배 커티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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