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노트] 상(象)을 잘 쓰는 노인과 휠체어를 잘 타는 과학자
  • 2019-05-07
  • 신윤오 기자, yoshin@elec4.co.kr

칼의 노래, 자전거여행 등으로 유명한 김훈 작가의 최신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는 인상깊은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동네 공원에서 노인들이 나눈 대화를 옮긴 대목이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물었단다. “그, 최씨 있잖아, 1.4 때 내려왔다는 사람, 요즘 안 보이네” “그 사람 죽었대, 부산 사는 아들네 집에 가서는 죽었다구만.” 그러자 또 다른 노인이 끼었다. “아니, 최씨가 누구야? 난 기억 안 나”

“아, 거 왜 상(象) 잘 쓰는 사람 있잖아. 상으로 난데없이 옆구리 찌르는 사람 말이야, 못 당하지, 못 당해.”

작가는 공원 장기판 주변의 노인들 이야기를 엿 듣고, ‘그 사소한 것의 신선함에 놀랐다’고 썼다. 그렇게 기억되는 생애는 얼마나 가벼운가, 라고 감탄하며 자신은 장기에서 상을 잘 못 쓰는 사람이니, 후에 기억된다면 ‘상 잘 못 쓰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적었다.
 

최초로 찍힌 블랙홀 사진(사건 지평선 망원경(EHT) 프로젝트 홈페이지 참조)
 
그런가 하면, ‘휠체어를 아주 잘 탔던 과학자’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다. 194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지 300주년이 되는 날(1월 8일)에 태어난 스티븐 호킹은 21살 때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걸려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하지만 그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나중엔 휠체어를 타고 내리막을 질주하는 일도 즐겨 주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단다.

과학계에서는 최근에 촬영된 인류 최초의 블랙홀 사진을 계기로, 상대성이론를 고안한 아인슈타인과 호킹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조명했다. 호킹은 1965년 로저 펜로즈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함께 블랙홀 중심의 에너지 밀도가 무한대인 특이점 정리를 발표해 우주 곳곳에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 가장 멀리까지 상상력을 발휘했던 인간 중의 한명이 됐다.

또한, 블랙홀도 입자를 방출하며 이로 인해 질량과 에너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증발해 없어질 수 있다는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를 수학적으로 증명했다(이후 이 이론은 많은 반론을 받아들여 수정되기도 한다). 호킹이 지난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그 불편한 몸으로 블랙홀 연구를 했다니, 그는 자신의 연구에 ‘블랙홀을 잘 쓰는 사람’으로 기억될 만 하다.

기억된다는 것과 기억하는 것과의 차이

필자는 문득 상을 잘 썼던 노인과 블랙홀을 잘 아는 과학자로 기억되는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누군가로 기억되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이든 간에, 기억하는 사람의 한정된 정보나 편리한 방식으로 규정되기 십상이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을 잘 쓰고, 휠체어를 잘 타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것이 참으로 유쾌하고 경쾌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생을 마칠 때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일일 것이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고마워하고 사랑을 표현했는지 기억하는 일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상’을 잘 못 쓰더라도 ‘인상’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면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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