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와 필자는 세 번을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약 15년 전이다. 그 전에도 여기저기에서 기자 노릇을 하던 필자가 반도체 분야에 처음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반도체 분야의 현안을 취재하고 싶어 그에게 다짜고짜 연락했다. 말하자면 반도체 초짜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당시 시스템반도체의 대가(그는 한국 최초로 386/387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개발한 바 있다)라 불리던 교수가 흔쾌히 시간을 내어 준 것이다. 그 때 진행한 인터뷰 내용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 시종 조용한 어투로 SoC(시스템온칩)의 육성을 얘기했고 이를 위한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던 기억이 있다.
그와 두 번째 만남은 시간이 많이 지나, 지난해 봄 강남에 위치한 구글캠퍼스였다. 그는 스마트IT융합시스템 연구단(CISS)의 단장 자격으로 글로벌프런티어연구단 투자유치설명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 만에 명함을 건넨 나를 그는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그를 인터뷰한 기자가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필자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소식을 종종 듣곤 했다. 그는 이날 연구단의 연구 성과를 통해 탄생한 창업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해 말 그대로 ‘발로 뛰고’ 있었다.
경종민 교수
그를 세 번째 만난 곳은 다시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지난 12월 말에 개최된 (사)반도체공학회의 학술대회이다. 그는 이제 학교 강의를 내려놓고 (스마트IT융합시스템) 연구단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술대회 키노트 발표자로 나선 그는 ‘창업: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를 통해 창업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창업을 해야 하는지를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학회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세 번을 만난 인연(이라고 해서 피천득의 수필처럼 애틋하거나 각별한 사이는 아님을 밝혀둔다)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KAIST의 경종민 교수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경 교수는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벨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1983년 KAIST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KAIST-IT연구소장, 반도체설계교육센터 소장, 고성능집적시스템연구센터 소장 등을 역임했다. 활발한 연구 활동을 통해 반도체 설계분야의 국제논문 200여 편을 발표하며 각종 학술상과 논문상을 받은 그야말로 한국 반도체 학계의 산 증인이라고 말할 만한 학자이다.
‘요새 창업에 미쳐 있다’
이처럼 반도체 학계를 대표할 만한 경 교수가 ‘요새 창업에 미쳐 있다’고 소리치고 다닌다. 거목과 풀만 있는 양극화의 땅, 대기업 몇 개와 하청 중소 기업만이 존재하는 이 땅에는 다양성(규제 과다)과 자유, 건강함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건강한 기술/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강한 생태계는 다양성과 창의, 도전에서 나온다는 것. 단적인 예로 이공계가 살아야 인생이 살고 나라가 산다(그가 15년 전에 쓴 제목이기도 하다)고. 대학은 연구, 창업, 경영이 망라된 교육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업이 한국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경 교수는 그 이유를 ‘역동성’을 관건으로 꼽는다. 사람도 국가도 열정이 식을 때, 창의가 사그라질 때,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창업하는 나라가 살아남는단다. 경 교수는 특히, 성공하려면 기술은 ‘응용’이 핵심이라는 것. 말하자면 ‘쓸 데 없는 것’은 정말 쓸 데 없다는 투다. 또 하나 기술의 핵심으로 ‘양산성’을 든다. 논문으로만 그치는 기술은 창업 기술로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경 교수가 창업을 부르짖는 이유는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연구단의 일과 무관치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 분야를 대표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림이 작지 않다. 교단을 내려 온 노 교수가 ‘역동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실하고 성실한 젊은이들이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하여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다”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들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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