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전문 용어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
[전자과학 신윤오 기자] 전라도 집안으로 시집 온 서울 며느리가 주방에서 난감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음식을 만들던 시어머니가 새색시에게 갑자기 ‘거시기’를 가져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순간 당황한 며느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머니, ‘거시기’가 뭐죠. 그 물음에 시어머니는 다시 묻는다. “그거 있잖아, 그거” 답답한 며느리는 다시 용기를 내서 물었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에 ‘멘붕’이 왔다.
그거 있잖아, 거시기…
오래된 이야기다. 그 지역만의 언어습관이랄까.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들은 안다. 거시기가 거시기라는 것을. 비슷한 환경에서 함께 살아 온 사람들은 일에 대한 전체 프로세스를 공유하기 마련이다. 그 일의 전후 사정을 알기에 일일이 특정한 언어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굳이 ‘두 번째 주방 서랍에 들어 있는 빨간색 플라스틱 용기의 간장병’을 말하지 않아도, 간장이 필요한 때에 ‘거시기’라고 말하면 ‘간장’을 말하는 줄 안다. 물론 나이 많은 어른들이 특정 단어가 곧장 떠오르지 않아 그리된 사정도 있겠지만, ‘척하면 척’이라는 식으로 거시기를 모른다하면 ‘좀 거시기’할 뿐이다.
말이 그렇다. 같은 말이 다르고, 받침 하나에 전혀 엉뚱한 말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감이 다르고 의미도 달라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난봄에 벌어진 삼성증권 공매도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삼성증권의 주식배당 입력 오류와 직원들의 유령주식 매도 사건이다.
‘공짜로 얻은 주식을 매도했다는 개념’으로 공매도(空賣渡)라는 한자어와 금융용어인 공매도(short sale)를 혼동하면서 급기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공매도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등장했다. 미국에서 쓰이는 금융 용어인 ‘short sale’ 또는 ‘short selling'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국내에선 이를 공매도라고 한 것이 단초이다. 차라리 ‘단기 매도’라고 쉽게 풀어쓴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다.
용어 문제는 법률과 관계되었을 때, 더 민감해진다. 최근 불거진 BMW 화재사건으로 소비자 피해보상과 자동차 교환 환불 제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여론에서도 용어 문제가 제기됐다. 이 제도를 관할하는 자동차관리법상의 ‘하자와 결함’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존재하지 않아 향후 소비자 피해보상에 혼선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법문에 명기된 ‘결함’은 대체로 자동차의 구성품이기만 하면 그 고장을 결함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은데 정확한 정의가 없다. ‘하자’ 또한 정의 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BMW의 배기가스재순환장치 고장을 중대한 하자라고 해야 하나 이를 차량 ‘결함’으로 칭하는 현실이 그렇다. 그 말이 그 말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문구 하나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법률 분쟁이 아닌가.
흔히 쓰는 '자율주행' 용어, 소비자에 혼동 줄 수도
현재 입법 추진 중인 ‘자율차 상용화 촉진 지원법(안)’에도 용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율주행’이라는 용어를 법률에 그대로 명시하기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많다. 다시 말해, 자율주행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자동차가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명령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자율주행’은 자동차가 독자적으로 모든 기능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자율주행보다는 “주행자동화”라는 용어가 더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미국자동차기술학회(SAE) 제시안에도 “autonomous”보다는 “driving automation”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 무드가 조성되면서 다시금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언어가 아닐까한다. 북한 IT 용어에서 ‘플러그 앤 플레이(plug and play)’를 ‘끼운즉시동작’이라고 하고 캐시메모리를 ‘고속완충기억기’라고 한단다. 단어만 보면 의미까지 아주 명쾌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요새 이슈가 되고 있는 블록체인도 우리말로 ‘공공기록장부’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앞으론 새로운 IT 용어가 입에 붙지 않는 ‘거시기’한 일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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