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이라는 말은 참으로 오묘하다.
‘4’라는 숫자와 ‘혁명’이라는 단어의 결합부터 수상했지만 애써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습이 안쓰러울 때가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언제부터 시작했고 정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몰라도 모두가 알아야 하는 매우 이상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최근 국제무역연구원이 발표한 ‘4차 산업혁명 주요 품목의 수출동향과 국제 경쟁력 비교’라는 보고서 제목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마치 4차 산업혁명이 실재하고(전제하고), 거기에 합당한 주요 품목이 있으며, 수출 경쟁력이 곧 4차 산업혁명의 경쟁력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의 수출 경쟁력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보고서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세계 ICT 수출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점유율은 5.9%(세계 6위)로 세계 전체 수출시장 점유율(3.1%, 세계 8위)의 약 두 배 수준일 뿐 아니라 지난 4년간 ICT 수출 증가율은 전체 수출 증가율을 상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ICT 수출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28.7%(2016년 기준)로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품목을 7개로 상정하여 각각의 경쟁력을 분석한 결과, 리튬 2차전지와 차세대 디스플레이의 수출 경쟁력은 높으나 다른 품목은 아직 취약한 상태였다. 리튬 2차전지는 세계 수출 순위가 3위로 12.6%의 수출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차세대 디스플레이의 수출 순위는 2위에, 수출시장 점유율 19.5%를 차지했다.
이에 반해 지능형 로봇(수출시장 점유율 4%), 항공 우주(0.6%), 전기자동차(4.4%), 첨단 의료기기(1.5%), 시스템반도체(5%) 등의 수출 경쟁력은 그나마 비교 우위에 있거나 낮은 상태였다. 문제는 이 중 전기자동차를 제외하고는 최근 몇 년 사이의 변화추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통계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업들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요와 가치를 창출하는 시장 창조형 혁신을 추구해야 하며 정부는 과감한 투자와 플랫폼 조성을 통해 민간 기업들의 시장 창조형 혁신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맞는 말이다. 기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시장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정부도 그와 같은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의 기업이나 정부는 항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게 혁명이라는 자극적인 말 앞에 숫자 하나가 더해졌다고 하루 아침에 모든 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한쪽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호황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지만 또 다른 편의 시스템반도체 산업은 매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물론 스타트업은 사업하기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한 두 분야의 웃음소리가 대다수의 한탄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현실을 4차 산업혁명의 수출 경쟁력이 잘 말해준다.
흔히 뻔히 알고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회색 코뿔소’라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산업 트렌드를 달려오는 ‘회색 코뿔소’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냥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가 좋을 때, 더욱 더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기업에 신경써야 하고,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이라는 큰 주제에 매몰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혼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수출 경쟁력을 넘어, 우리 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업계 현실을 바로 보는 일부터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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