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수학자 앨런 튜닝이 영국의 새 50파운드 지폐 인물로 선정돼 화제가 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 기계로 사용한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해 연합군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021년부터 통용될 새 지폐에 과학자를 싣기로 한 영국은 스티브 호킹, 윌리엄 허셀,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과 같은 (실로 엄청난) 후보들 중에서 튜닝을 선택했다.
알고리즘과 계산 개념을 튜링 기계라는 추상 모델을 통해 형식화함으로써 컴퓨터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튜닝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이들 알고 있지만 그의 삶 또한 극적이다. 그가 나중에 동성애자로 체포돼(당시에는 범죄였다) 화학적 거세를 받았으며, 이후 독사과를 먹고 자살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튜닝의 독사과와 애플사의 사과
연상(聯想) 작용이라는 게 있다. 하나의 관념이 그것과 연관된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이를테면 ‘공항’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여행’이라는 단어와 모습이 생각나는 식이다. 한때 애플 컴퓨터의 로고가 튜닝의 한 입 베어 먹은 ‘독사과’에서 따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애플에서는 로고의 모델이 뉴턴의 사과라고 주장했고 나중에 스티브 잡스도 같은 말을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한입 베어 먹은 사과가 독사과에서 비롯됐다는 것보다는 만유인력의 발견을 상징하는 사과로 연상되는 게 득이 될 것이다.
DNA(디옥시리보 핵산)라는 단어가 주는 연상 작용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DNA 분석 기술로 덜미가 잡힌 화성 연쇄살인 미제 사건의 용의자 사례처럼, ‘DNA’하면 우리는 범죄의 ‘단서’를 연상하게 됐다. 아주 적은 표본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보존만 된다면 수십 년이 흘러도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DNA와 범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범죄자들에게는 DNA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가 되지만 각종 범죄에 불안해하는 현대인에게는 범죄 예방 효과를 주기도 한다.
사실, 유전자의 본체를 이루는 DNA는 그 비밀을 찾기 위한 생명과학자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물질이다. 이전에는 염색체의 단백질 안에 유전정보가 들어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야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생명체의 기원을 찾는 진짜 ‘증거’ 물질 중의 하나가 됐다. 세 살배기 아이에게 화상을 입힌, 아파트 위층에서 떨어진 파렴치한 담배 꽁초의 주인을 찾기 위해 분석해야 하는 것이 DNA의 역할이라고 하기엔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다.
사과 하나가 연상시켜 주는 이미지는 뉴턴에서 튜링, 스티브잡스까지 이야기의 편린을 펼쳐놓고 DNA라는 단어 하나는 몰지각한 담배꽁초 주인에서부터 생명의 근원을 쫓아가는 생명공학까지 뻗어 나아가기도 한다. 연상 작용이 불러일으키는 파급 효과는 시대를 건너고 분야를 뛰어 넘는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 사회 뉴스를 보면 연상 작용이 얼마나 악의적으로 도용될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하나의 단어에서 비롯된 정보의 줄기가 말 그대로 연상에 의한, 연상을 위한 과도한 말의 홍수를 만들어낸다. 논두렁에 버려진 고급 시계가 일으킨 연상 작용으로 이득을 얻은 무리들이 많았던 탓인지, 자극적인 단어의 연상들이 현상과 진실을 흐리는 것을 목도했다. 사모펀드니, 압수수색이니 하는 단어가 떠올리게 하는 불법과 범죄의 이미지가 본질을 가리게 되면 허구로 점철된 상상력과 거짓만이 넘쳐날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악의적인 연상 작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의도를 가지고 이용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그렇게 악용된 단어와 말이 칼이 되어 아무나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스티브 잡스가 튜닝의 독사과에서 회사 로고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썰'은 그의 고독과 상상력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로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했던 그가 천재 수학자를 기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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