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부 과학책 읽기] ⑤ 미술관에 간 화학자
‘집사부 과학책 읽기’ 코너는 ‘집’에 ‘사’ 놓고 안 읽은 ‘부’담스러운 과학책 읽기’를 줄인 말로 예능 프로그램 이름을 빗대었다. 글의 구성도 무협영화 줄거리처럼 원한 → 고난 → 수련 → 복수, 라는 패턴을 차용하여 과학책을 읽고 정리한다(글쓴이 집사부 붙임)
제1장 원한 -단두대로 간 화학자
프랑스 시민혁명이 막바지에 이르던 무렵인 1794년 5월 8일, 이제 막 50을 넘긴 한 사내가 혁명 광장의 단두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참수되었고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집니다. 그 사내는 바로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입니다.
뛰어난 화학자이자 천문학, 식물학, 광물학 등에서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사람이 왜 허무하게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을까요. 19세기 수리물리학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수학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그를 두고 이렇게 안타까워했습니다.
“그의 머리를 베어버리는 일은 한순간이지만,
그와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후세는 라부아지에를 ‘근대화학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그의 부인과 함께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주인공일 것 같은 라부아지에는 정작 아내를 바라보고 있고, 그런 아내는 정면을 응시합니다. 약간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거기에도 이유는 있습니다.
근대화학을 출발시킨 라부아지에의 [화학원론]에 기여한 그녀의 공로가 크기 때문입니다. 실험 조수, 연구 동료, 도서 사서, 삽화가, 출판가, 번역가 등의 면모를 뽐낸 라부아지에의 부인 마리는 다재다능한 남편만큼이나 유능했습니다. 그녀를 근대화학의 어머니라고도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 부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단순히 그림 한장을 넘어 과학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미술관에 간 화학자]은 미술과 화학, 나아가 화학자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6년 여 전 개정판의 부제 ‘이성과 감성으로 과학과 예술을 통합하다’라는 말에 걸맞게 과학계와 예술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서가에 배치한다면 미술관련 서적에 꽂아 넣어야 할지, 아니면 과학서적란에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이 될 이 책은 출간되었을 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소설만큼 재미있다는 언론의 서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출판사(어바웃어북)는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의학자’, ‘수학자’ 등 학자 시리즈를 내어 융합 학문에 대한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림과 화학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대학에서 화학과 산업공학을 공부한 저자(전창림 교수)는 프랑스로 날아가 고분자화학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프랑스 유학 당시에 화학 실험실과 오르세 미술관을 수없이 오가며 미술에서의 화학문제, 즉 물감과 안료의 변화, 색의 특성 등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개정증보판 머리말에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털어놓습니다. 머리 좋은 한국 학생들이 과학 공부를 재미없게 생각하는 이유부터 첨단 과학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까닭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결책을 저자는 ‘책읽기’에서 찾았고 그것도 재미있고 유익한 독서가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의 말대로 예술적 감상과 인문적 소양을 키우면서 과학적 사고까지 함양하도로 돕는 명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장 고난 -성모 마리아의 치마 색이 파란색인 이유
책은 조각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는 그가 그린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천장화가 있습니다. 1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에 391명의 인간 형상이 담겨 있는 명화입니다. 그림 정중앙 약간 위쪽에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자리하는데, 근육질 몸을 한 예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독 마리아의 파란색 치마가 눈에 띕니다. 왼쪽으로 고개 숙인 성모 마리아의 머리와 오른쪽으로 굽힌 다리가 대칭을 이루는데 거기에 파란색 치마는 그녀의 성스러움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듯합니다.
저자는 이 파란색을 ‘울트라마린’이라는 염료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다(marine)', '멀리(ultra)'라는 말에서 유래하는 울트라마린의 원료는 청금석(Lapis Lazli)이라고 합니다.
당시 청금석은 황금 다음으로 비쌌기 때문에 성모마리아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좀 더 저렴한 파란색 안료(아주라이트)를 찾아 썼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예를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작품인 <그리스도의 매장>이라는 그림에서 찾습니다. 이 그림은 오른쪽 하단에 사람모양의 빈자리가 있는 미완성 작품인데 이는 화가가 울트라마린을 구하지 못해 아예 그려 넣지 않은 성모 마리아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그림 속의 막달라 마리아의 옷 색에서 찾습니다. 막달라의 칙칙한 갈색 옷 색이 원래는 (값싼)청색이었는데 변색해서 갈색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파란색 치마가 화학자의 눈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파란색 옷 사례는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Giotto di Bondone)의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옷 색깔에는 파란색이었는데 대부분 벗겨진 흔적이 보입니다. 여기에는 당시 그림 그리던 프레스코 기법과 템페라 기법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프레스코는 젖은 석회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물에 갠 안료를 석회에 스며들게 하여 비교적 그림이 오래 보존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나중에 발명된 템페라 기법은 색상이 보다 선명하고 붓질이 쉬운 장점이 있으나 접착을 위하여 안료에 달걀 노른자를 개어서 사용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벗겨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가 전체적으로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지만, 마리아 부분이 이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기 때문에 벗겨진 것입니다. 당시 화가는 천상의 광택을 가진 파란색을 살리기 위해 마리아의 옷 부분에 템페라 기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유화의 창시자로 알려진 화가 에이크는 식물성 불포화지방산인 아마인유(Iinseed oil)를 이용하여 정교한 붓질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명작 <아르놀피니의 결혼> 작품이 생생한 색감과 놀라운 테크닉을 표현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불포화지방산은 녹는점이 낮아 상온에서 액체 상태이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불포화기가 가교 결합을 합니다. 이것이 굳어져 단단한 도막을 형성하여 그림물감에 이용한 것입니다. 스미고 번져 정교한 묘사가 힘든 프레스코나 템페라에 비해 정밀한 묘사가 가능했기에 이후에도 인류의 수많은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건강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불포화지방산이 회화사에도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온 것입니다.
제3장 수련 - 야경, 원래는 야경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프레스코, 템페라, 유화 등의 기법과 이를 활용한 그림들이 어떻게 발전하게 됐는지 몇 가지 살펴보았으니 좀더 들어가 보도록 하죠.
다방면에 천재성을 드러낸 화가 다 빈치는 의외로 화학지식에 무지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도발합니다. 다 빈치의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은 유화와 템페라 기법을 혼합하여 그렸는데, 이러한 혼합 기법이 후에 그림 변색의 원인이 됐다는 것.
템페라에 사용되는 달걀 노른자는 수분을 거의 50% 이상 함유한 에멀전인데 유화는 기름이므로 수진 균형이 깨어져 두상이 섞이지 않고 분리되는 상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 빈치는 납이나 구리를 함유한 색과 황을 함유한 색을 함께 자주 사용했는데 이들은 서로 반응하면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또한 평평하게 만든 석회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석회는 탄산화하여 울트라마린 등과 반응하면 탈색됩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유화 기법을 완성한 에이크의 그림과 비교하면 다 빈치의 그림은 변색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화학반응으로 그림의 제목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야경>은 원래 그림의 배경이 밤도 아니고 제목도 그렇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렘브란트가 주로 사용하던 ‘키아로스쿠로’기법이 전체적으로 어둡게 하고 중심과 강조점만 밝게 처리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해도 밤 풍경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1642년)를 지나 다시 18세기에 그림 보존을 위해 보수하게 되었는데 황토색 또는 갈색 바니시를 덧칠하는 바람에 더 어둡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렘브란트가 납이 포함된 연화물 계통의 안료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황과 만나면 검게 변색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가 많이 사용한 색 중에 선홍색의 버빌리온(vermilion)은 황화수은(HgS)입니다. <야경>과 마찬가지로 밀레의 <만종>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처음에는 탁하고 칙칙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야경 그림처럼 그림이 검게 변하는 흑변 현상이 <만종>에도 나타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는 산업혁명으로 대기 중 황산화물(SOx)의 농도가 높았을테니까요.
제4장 복수 -그림 한 점이 혁명에 끼친 영향
이 밖에 이 책에는 화학자들에게 아주 친숙한 연금술과 얽힌 그림, 화학의 4원소로 표현한 우주의 근원을 나타낸 그림이야기부터 산소를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흥미롭게 추적합니다. 특히 태양 빛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성공한 뉴턴의 업적이 회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인상파 회화를 사례로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상주의가, 사실 당시에 막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과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이유를 여러 인상파 화가들에게 찾습니다.
다시, 서두에 꺼냈던 화학자 라부아지에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근대 화학의 문을 연 그가 단두대로 보내진 이유는 가난한 시민의 세금을 착취하는 악덕 세금징수원이었다는 이유였습니다. 화학자가 세금징수원은 또 무슨 말일까요. 일찍이 아버지의 바람대로 스무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라부아지에는 자연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스물다섯에 프랑스 한림원 회원이 되고, 그해 세금징수원조합에 들어갑니다. 낮에는 관리로 일하고 저녁에는 화학 실험을 하는 생활을 이어가게 되죠.
하지만 이 때의 세금징수원 경력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학문적 원수인 마라(Jean-Paul Marat)의 고소를 시작으로 프랑스 혁명기의 세금징수조합의 청산과 맞물려 혁명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의사이자 과학자이기도 한 마라는 자신의 한림원 입성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라부아지에와 한림원을 적으로 여기게 되면서 대혁명기에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진 것이죠.
급진적 혁명주의자 마라는 나중에 온건파 혁명주의자에게 살해당하고, 그런 그의 죽음을 표현한 그림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입니다. 당시 마라와 함께 급진적 자코뱅파에 있던 화가 다비드에 의해 그의 죽음이 교묘하게 미화됩니다. 욕조에서 살해된 모습을 그린 그림은, 국민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다고 억울하게 살해당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림은 그 재료의 화학적 요소부터 화학과 관련된 복잡한 배경까지 다양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이 아쉬운 점은 초중반까지는 이러한 소재를 풀어내다가 중후반에 가서는 그냥 그림 이야기로만 흐르거나 일반 과학이야기가 곁들이는(미술관에 간 물리학자?)식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과학의 통섭에서 선사하는 재미와 흥미는 읽는 이의 상상력까지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누구 말대로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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