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부 과학책 읽기’ 코너는
‘집’에
‘사’ 놓고 안 읽은
‘부’담스러운 과학책 읽기’를 줄인 말이다. 글의 구성도 무협영화 줄거리처럼 원한→고난→수련→복수, 라는 패턴을 차용하여 과학책을 읽는다(글쓴이 집사부 붙임).
저자: 고정희 /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 나무도시
원한: 무엇이 끌렸나
지난해, 조선말 민초들의 삶과 의병 이야기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스터 션사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안 보신 분들도 있어 설명하지면, 극중 이병헌(유진 초이 역)과 김태리(고애신 역)는 서로 처한 신분상의 문제도 있고 남의 이목도 피하고자 어느 약방의 약초함을 통해 편지를 교환합니다. 우리가 한의원에서나 봄 듯한 약초함에는 수많은 한약 재료의 이름이 씌어져 있지요. 눈썰미가 좋은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극중 남녀 주인공이 우편함으로 사용한 약초함의 이름은 어성초(魚腥草)입니다. 그래서 집사부는 한약을 다루는 이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부: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주인공은 하필이면 물고기 비린내가 난다는 어성초 함에 편지를 넣었을까요?
한약사: 글쎄, 모르겠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이면 차라리 ‘당연히 돌아온다’는 ‘당귀(當歸)’함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의 남녀 주인공은 약방의 어성초 약초함을 우편함으로 사용한다. (사진: 미스터션사인 홈페이지)
한약에 ‘한’ 자도 모르는 집사부는 한약사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드라마 작가가 애초에 시나리오에 어성초 함을 쓴 것인지, 촬영하다보니 어성초함이 카메라 각도 상에 잘 잡혀서 고르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해독·항염·항암 효능을 갖고 있는 어성초가 독소를 제거하는 매우 유용한 약초라는 점에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신분과 일본이라는 독소를 모두 이겨낸다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쓰면 억지일까요).
어성초, 당귀처럼 우리가 약으로 쓰는 식물도 이러한 사연이 있을진대 지금처럼 봄에 사방팔방 돋아나는 꽃 나무들은 어련하겠습니까. 출간된 지가 제법되는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2012년)>라는 책을 다시 집어든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난: 어디가 걸리던가
베를린 공과대학 조경학과에서 학위를 취득한 지은이 고정희 박사는 유명 국내외 기업의 조경 디자이너 근무하다 독립하여 현재는 개인 연구실인 “고정희 조경설계연구소”를 운영하며 많은 식물, 조경 관련 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책 서문에 쓴 것처럼 저자가 바라보는 식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식물은 내게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정원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정원에 대한 책을 쓰는 내게 식물은 언제나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늘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들이 두런두런 들려 준 이야기는 참 경이로웠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책 제목과 부제 ‘식물에 새겨져 있는 문화 바코드 읽기’에서 잘 반영돼 있습니다(책 제목과 부제를 출판사에서 정하는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자의 의도가 반영됐을 것이라고 전제함). 책에서도(2장 작전의 명수들)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들은 인간에게만 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의 혼과 식물의 혼이 교감하면서 인간사가 진행이 되는데 여기서 식물이 오히려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못하니 수동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정보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을 ‘은밀히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정보 시스템이 바로 신, 혹은 혼인 셈이다.”
이에 앞서 볼프디터 슈톨은 <식물의 혼>이라는 책에서 식물학자들 간에는 식물이 보여주는 여러 불가사의한 능력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며 아직 공식적인 이론이나 연구논문으로 발표되고 있지 않지만, 많은 식물학자들이 식물의 지능 혹은 의식을 믿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저자는 바흐의 음악과 커피와의 관계, 인디언과 옥수수의 관계 등의 이야기부터 신화의 세계까지 식물에 얽힌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수련: 어떻게 읽었나
저자가 세상을 은밀히 지배하는 첫 식물로 ‘튤립’을 꼽고, 책의 시작으로 삼은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초부터는 놀이공원을 비롯하여 유명 관광지에서 한창 튤립 축제를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나 가족들은 봄볕 아래 그림처럼 펼쳐진 튤립 꽃 밭에서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튤립의 역사를 알게 되면 왜 저자가 튤립을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튤립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낙농국가 네덜란드이지만 사실 튤립의 원산지는 터키입니다. 16세기 중반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사람을 시켜 터키 땅을 둘러보라고 시켰답니다. 그 외교관이 이스탄불에 도착하고 보니 여태껏 보지 못한 꽃들이 여기저기 만발해 있고 심지어 사람들이 머리에 한 송이씩 꽂고 다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물었답니다.
오스트리아 외교관: (손으로 가리키며) 저걸 무엇이라 하느냐
터키인 가이드: 아, 저거요. 저건 튀르판이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동문서답인지 언어의 장벽이 문제였든지, 이들의 대화에서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터키에서는 머리에 쓰는 터번을 튀르판이라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가리키는 것을 꽃이 아니라 터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튀르판이 튤리파가 되었다가 다시 튤립이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 튤립이 터키에서 유럽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치 않습니다. 오스트리아 외교관은 튤립 구근을 황제에게 보냈고 황궁에 심어진 튤립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까지 닿습니다.
특히 1634년 네덜란드를 휩쓸었던 튤립 열풍은 투기가 되어 시민 경제 파산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비싼 튤립이 줄무늬의 ‘셈퍼 아우구스투스’였는데 구근 한 개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니 말 다했죠.
이 밖에 토마토가 의리없는 식물로 대접받은 까닭과 유럽 이민사를 감자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이유, 작은 후추 한 알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복수: 무엇을 얻었나
서양 신화와 동양 신화 이야기로 들어가면 이 책의 식물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집니다.
예를 들어, 1631년 니콜라 푸생의 그림 ‘플로라의 왕국(드레스덴 미술관)’을 보면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어서 꽃으로 환생한 존재들로 표현됩니다. 저자의 말대로, 죽은 사람들과 죽어서 변한 꽃들이 같이 그려져 있어 마치 지중해성 서천꽃(우리 무속에 나타난 저승의 동쪽 끝에 위치하는 신비한 꽃밭) 카탈로그인 셈입니다. 아이아스 장군의 투구꽃부터 수선화, 히아신스, 아네모네(복수초), 해바라기 등 많은 (신화) 인물들이 죽어서 된 꽃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푸생이 왜 비너스 대신에 비교적 아래 등급인 플로라 신을 중심으로 억울하게 죽은 신들을 택했는지 저자는 화가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끄집어내어 그 비밀을 풀어냅니다.
또한 진달래가 피어야 봄이 온다(4장) 편에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건넨 이유를 설명하고 ‘분홍의 힘, 복사꽃(5장)’ 편에서는 귀신이 왜 복숭아를 두려워하게 됐는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물이 가까운 곳에서 자라는 버드나무가 동양과 서양의 문화에서 어떻게 그려지고(6장), 심청이 물에 빠져야 하는 이유를 연꽃으로 접근합니다(7장).
사과 이야기는 또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뉴턴과 스티브잡스의 사과가 역사를 바꿨다고 하지만 정작 한국의 사과나무는 어떻게 유래했는지 아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에 관련 문헌을 찾아 한국의 사과를 추적하는 저자의 노력이 엿보이고(8장), 마가목과 주목을 설명하는 9장에서는 마술봉이 등장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끄집어냅니다. 해리포터 이야기에 마가목 마술봉과 주목 마술봉 부분을 덧붙여 나무의 특징을 설명한 부분은 재미와 지식을 한꺼번에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화가 푸생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가 70세의 고령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 ‘겨울’은 대홍수를 모티브로 가져왔는데, 모든 것이 휩쓸려 나가는 인류의 마지막 밤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물에 빠져죽어 둥둥 떠 있지만 한쪽 편에 한 어머니가 건네는 소녀를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뻗어 잡는 장면이 나오죠. 아이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이들은 살아남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푸생은 굳이 이들을 그려 보여줍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이들이 있는 절벽 위의 올리브 나무입니다. 홍수가 끝난 뒤 비둘기가 날아 와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보여 준 일이 성서에 나오죠. 저자는 이 그림에서 푸생이 어린 소녀와 나무에서 인류의 희망을 봤다고 판단합니다.
강원도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돌아갈 터전을 잃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이유니까요. 그와 별도로 산불로 사라져버린 산림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다시 복구되는데 20~30년이 걸린다고 해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무가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나무에 걸린 희망이 인류의 희망과 다르지 않다고 저자가 마지막장까지 말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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